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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인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생애와 작품 세계

by 태비왕자 2024. 2. 24.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생애와 작품 세계

 

세계 문학의 거장이자 독일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괴테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에 태어나서 1832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와 작품은 당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정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괴테

 

 

괴테는 소설, 시, 희곡, 여행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남겼으며, 그 가운데서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는 가장 널리 알려 졌습니다. 

이 두 작품들은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역사적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다른 많은 문인들에게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미겔 데 세르반테스에 버금가는 뛰어나 문학자로 평가되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살아 활동하던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독일 문학을 넘어 서양 문학을 논하는데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됩니다.

 

이 글에서는 괴테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의 작품을 읽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괴테의 작품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작품 안에 담겨있는 인간의 삶과 욕망, 그리고 감정, 고민들은 오늘날

이 세대에서도 공감되고 있습니다. 괴테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

또한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생애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왕실 고문관인 아버지 요한 카르파르 괴테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시장의 딸인

어머니 카타리네 엘리자베스 텍스토르 사이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는 평민 출신이긴 했지만, 제법 규모가 큰 세탁업 공장을 경영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쉽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이로써 왕실 고문인 추밀 고문관까지 오르게 된 평민 출신으로써 엄청난 출세를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카타리 엘리자베스 텍스토어 역시도 평민 출신 집안이었지만, 고향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이었던 요한 볼프강 텍스토어의 딸이어서 어린 괴테 역시도 유복하고 풍족하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덕분에 고등교육 또한 무난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를 낳았을 때의 나이는 불과 18살이었고 아버지와의 나이 차이는 무려 21살이나 났습니다.

 

괴테는 출산 당시 난산이었으며 산파가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못해 무호흡 상태까지 빠졌지만 인공호흡으로 간신히 살아

났다고 전해집니다. 괴테가 태어난 이후 두 남동생이 태어나게 되지만 어린 나이에 일찍 사망하였으며 이 두 사건으로 

어린 괴테는 우울감에 빠지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다행히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는 무난히 잘 자라나서 어린 괴테는 아주

많이 귀여워하였고 사이 또한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여섯 형제자매 중 성인으로 성장한 이는 괴테와 코르넬리아뿐이었지만, 그러나 코르넬리아 조차도 1777년 둘째 아이를

낳고는 출산 후유증으로 고작 스물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노년이 된 괴테는 회고하기를 " 아버지는 존경하지만 굉장히 엄격하고 까다로운 분이어서 어린 나에게는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책임감이 강하시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그런 분이셔서 정말 멋진 분이셨다."

어머니는 가정적이며, 너무나도 자상하셨으며 나에게 늘 자상함을 일깨워 주신 분이셨다."라고 회고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문학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아들 괴테가 글을 쓰는데 많은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글쓰기에 꽤 많은 흥미를 가졌던 어릴 적 괴테는 작문 학교에서도 높은 성적을 받았으며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여 푸짐한 용돈과 함께 칭찬을 하였다 합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문학 입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아버지의 전적인 지원으로 부족함 없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라틴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영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서와 히브리어, 이디시어등의

교육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전적인 후원과 도움 그리고 거기에 더한 괴테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그가 문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괴테의 문학적 정신과 문인으로서의 사상은 7년 전쟁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센에 의한 신흥 질서를 지지했던 아버지와, 구 세계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에 의한 질서를 옹호했던 외할아버지와의 이런 대립은 어린 괴테의 정신적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괴테는 아버지의 권유로라이프치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생활동안 괴테는

프랑크푸르트보다 더욱 선진적이며 인구 또한 많았던 그곳에서 계몽주의적 사상을 직접적으로 접하며 체험하게 됩니다.

그는 22세 때에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으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합니다. 이 인연으로 인하여 지금도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는 "괴테의 길"이라고 하는 길이 있으며, 괴테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법학 공부보다는 글 쓰기를 더 좋아했던 괴테는 24세 때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엔>을 집필하며 문학에 발을 내밀게 됩니다.

 

그런 1년 후 1774년 25세에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발표하게 되는데, 발표 직후 바로 그는 엄청난 유명세를 유럽 전역에 떨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괴테로 하여금 "나를 언제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한다."며 불만을 나타낼 만큼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작품은 괴테가 60년에 걸쳐서 완성시킨 필생의 대작이자 세계 문학 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파우스트> 조차도 그 인기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나 큰 유명세와는 달리 그는 작품 자체로는 큰돈을 벌지는 못하였습니다. 출판계약 당시 출판사는 그저 볼품없는 신인 작가일 뿐이라는 이유로 괴테에게 출판 인세를 조금밖에 주지 않았으며, 유럽 곳곳에서 횡횡했던 무단 복제 출판 사본물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서는 충분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는데, 괴테는 1775년부터 죽을 때까지 57년 동안  

작센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 일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나갔다.

괴테는 재상으로서의 삶과 문인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늘 갈등을 겪게 되지만,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소명만은 잊지 않았습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작품

 

소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 <친화력>

- <여우 레이나츠>

- <초록 뱀과 하얀 백합 아가씨>

 

희곡

 

- <괴츠 폰 베를리힝엔>

- <파우스트>

- <스텔라>

- <오누이>

- <에그몬트>

- <타우리스의 이피그니에>

- <토르콰토 타소>

- <자연의 딸>

 

 

- <서동시집>

- <프로메테우스>

- <산 위에서>

- < 발견>

- <마왕>

- <헤르만과 도르테아>

- <젊은 날의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