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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인물

성녀 리타의 삶과 영성

by 태비왕자 2024. 2. 21.

성녀 리타의 삶과 영성

성녀의 축일은 5월 22일이며,

1381년 이탈리아의 로카포레나에서 마르게리타(Margherita) 로티라는 이름으로 탄생하였습니다.

1457년 사망하였고, 1627년 교황 우르바노 7세에 의해 시복 되었으며,

1900년 5월 24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하여 시성 되었습니다.

 

 

 

성녀 리타

 

 

성녀 리타의 영성 생활

세례를 받으고 다음 날, 보자기에 싸여있던 이 아기에게 흰 벌떼들이 둘러쌓이게 되었습니다.

이 벌들은 전혀 아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채 아기의 입속으로 드나들었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은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지만,

부모의 강요로 성격이 잔인한 파올로 만치니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어린 리터는 고작 12세의 나이에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난폭한 성격의 남편은 자주 리타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를 가하게 됩니다.

남편은 적이 많았으며, 다른 여자를 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리타의 신앙심과 덕으로 그를 더 나은 인간으로 이끌게 됩니다.

그렇지만 적이 많던 그는 살해당하고 맙니다.

두 아이마저 죽자 리타는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세 번이나 입회를 신청하였으나 모두 거절

당하고 맙니다.

그 후 카시아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막달레나의 아우구스티누스회에 입회하게 되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고행과 기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 차례 영적 환시를 체험하였으며, 사망하기 15년 전에 이마에 예수님의 피 묻은 가시관 모양의

상흔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것은 깊은 상처를 남겼기에 낫지도 않았고, 죽는 날까지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성녀 리타의 죽음과 시성

1457년 5월 22일 사망 후 그녀는 카시아 대성당에 묻혔으나 시신은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성녀 리타는 종종 "검은 수도복"으로 묘사가 되는데,

실제로 막달레나 수도원은 베이지 혹은 갈색의 수도복을 입었습니다.

그녀는 또한 남편과 두 아들을 상징하는 가시나무 큰 십자가 혹은 세 개의 가시가 있는 종려나무 잎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 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임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더욱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주었으며,

자신과 같이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 하며 살아 간 성녀 리타는 좌절하고 실망에 빠져있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써 많은 이들의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